제주에는 여백이 있다.(한달살이,여행,육지)

한달살이.

제주 한달살이를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사람마다 이유는 다르겠지만, 결국은 "조금 천천히 살아보기 위해서" 가 아닐까 싶습니다.관광으로 제주를 가면 보통 2박 3일, 길어야 4박 5일입니다.

유명 관광지 몇 군데 찍고 맛집 몇 군데 들렀다가 돌아오면 제주를 본 것 같지만 사실은 제주를 스쳐 지나간 것에 가깝습니다.반면 한달살이는 다릅니다.

아침에 일어나 날씨를 보고 어디를 갈지 정하고,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동네를 산책하고, 바다를 보며 커피 한 잔을 마십니다.굳이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생깁니다.

특히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물때를 보고, 바람 방향을 보고, 조황을 확인하고, 저녁이면 항구로 향합니다.

잡히면 좋고 안 잡혀도 좋습니다.

재주바다석양
재주바다석양

포인트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커피를 마시고, 가끔은 잡은 생선을 나눠 먹기도 합니다.어느 순간부터는 낚시보다 그런 시간이 더 기다려지기도 합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한달만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제주에 갔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두 달이 세 달이 되고, 어느새 다섯 달이 지나 있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무늬오징어를 쫓아다니고, 한치를 잡고, 방어를 먹고, 서귀포항을 드나들며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결국 그 기억 때문에 다시 제주를 찾게 되었고, 나중에는 제주도민으로 살아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제주 한달살이의 진짜 매력은 관광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하루를 제주에서 살아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바다가 보이고, 저녁이면 노을이 물들고, 날씨가 좋으면 낚시를 가고, 비가 오면 하루 종일 쉬어가는 삶.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꼭 이렇게 바쁘게만 살아야 하나?"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제주 한달살이를 하는 이유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행.

인간은 여행에서 풍경만 얻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여행에서 가장 크게 얻는 것은 자신을 다시 바라볼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평소 우리는 늘 같은 길을 다니고, 같은 사람을 만나고,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그렇게 익숙한 환경 속에서는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떠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처음 가보는 길을 걷고, 처음 보는 풍경을 보고, 낯선 사람들과 마주합니다.

그 과정에서 평소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여행에서 휴식을 얻고,

어떤 사람은 용기를 얻고,

어떤 사람은 새로운 목표를 발견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행이 꼭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비가 오기도 하고,

길을 잃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불편을 겪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그런 기억들이 오히려 가장 선명하게 남습니다.

그래서 여행은 단순히 장소를 이동하는 행위가 아니라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낚시를 예로 들어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주로 낚시를 떠났다고 해서 매일 무늬오징어를 잡는 것은 아닙니다.

바람이 불어 출조를 포기하기도 하고,

물때가 맞지 않아 빈손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하루 종일 캐스팅만 하다 숙소로 돌아오는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과보다도

함께 웃었던 사람들,

항구의 밤바다 냄새,

차 안에서 바라보던 석양,

새벽 공기의 차가움,

낚시 후 먹었던 한 그릇의 식사 같은 것들이 더 오래 남습니다.

어쩌면 인간은 여행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떠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난 뒤에도 그 기억들은 남아 삶의 일부가 됩니다.

10년 전 제주 도두항에서 처음 한치를 잡았던 기억이 지금까지 이어져 제주 한달살이로, 다시 제주도민 생활로 이어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여행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새로운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시선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말입니다.

육지.

육지에 사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제주도는 종종 현실의 공간이라기보다 마음속에 있는 섬에 가깝습니다.

누군가에게 제주는 휴양지이고,

누군가에게 제주는 은퇴 후 살고 싶은 곳이며,

누군가에게는 언젠가 꼭 한 번 살아보고 싶은 로망입니다.

서울이나 수도권처럼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제주는 종종 이런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살고 싶다."

"출근 걱정 없이 낚시하며 살고 싶다."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조용히 지내고 싶다."

그래서 육지 사람들은 제주를 바라볼 때 풍경을 먼저 봅니다.

에메랄드빛 바다,

돌담길,

유채꽃,

한라산,

노을 지는 항구.

그런 아름다운 장면들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막상 제주에서 몇 달 살아보면 조금 다른 모습도 보입니다.

제주도 역시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바람이 며칠씩 불기도 하고,

비가 일주일 가까이 내리기도 하고,

태풍이 지나가기도 합니다.

물가도 생각보다 비싸고,

병원이나 대형 상업시설은 육지만큼 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겨울 바람은 상상 이상으로 강합니다.

낚시꾼이라면 더 잘 압니다.

계획한 출조의 절반은 바람 때문에 포기하게 된다는 것을요.

그래도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다 알게 된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시 제주를 찾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 제주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제주만의 여백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육지에서는 하루가 일정표대로 흘러갑니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날씨가 하루의 계획을 바꾸기도 하고,

바람이 일정을 결정하기도 하고,

노을이 사람을 멈춰 세우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주에 오래 머문 사람들은 관광지가 아니라 평범한 풍경을 그리워합니다.

동네 마트 가는 길,

아침 바다 냄새,

방파제에 앉아 커피 마시던 시간,

서귀포항의 밤바다 같은 것들 말입니다.

어쩌면 육지 사람이 바라보는 제주도는 두 가지 모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보기 전에는

"저기 가면 행복할 것 같다."

라는 로망의 섬이고,

살아본 뒤에는

"완벽하진 않지만 다시 가고 싶은 곳."

이 되는 섬입니다.

그리고 제주 한달살이를 해본 사람들은 알게 됩니다.

제주의 매력은 관광책자 속 풍경이 아니라,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데 있다는 것을요.


보목포구 앞에는 카페가 두 군데 있다. 아니, 카페 트럭까지 포함하면 세 군데쯤 된다.

가끔 그곳에 앉아 혼자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으면 마음이 참 편안해진다.

바다를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문득 예전에 읽었던 한 문장이 떠오른다.


"지루함은 가장 철학적인 기분이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바쁘게 움직이고, 계획을 세우고,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가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생긴다.

바다를 바라보고, 바람 소리를 듣고,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마시는 시간.

어쩌면 그런 순간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제주가 특별한 것은 유명한 관광지 때문이 아니라, 사람에게 그런 여백을 허락하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는 그런 곳이 아닌가 한다